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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epika2 2012. 11. 13. 16:22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선거철이 되면 국민들은 고민에 빠진다. 과연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온전하게 나라를 이끌고 서민경제를

살릴 것인가? 새로운 대통령은 어떤 소명을 갖고 정치에 임 할것인가?

그동안 그릇된 선거 풍토로 인해 염증을 느껴 투표율이 저조한것도 국민이 후보들에게 보내는 무서운 채찍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무슨 마음으로 정치를 했으며 어떤 환경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오늘은

지난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던 역대 대통령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올랐을때 각자의 시대적 소명

이 분명히 있었고, 재임 기간 동안 나름대로 그 역할에 충실하였으며, 누구든 과실은 있었지만 치적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순환적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공功과過에 대한 정확한 평과와 인지는 12월 19일

실시될 대선에서 우리의 선택에 향방을 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가 대동령이

되면 나을까를 알기 위해 주요 후보들을 비교 평가해 보는데, 과거의 전직 대통령에 관해 정확한 사실들을 살펴보는

일 또한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이런점에서 현대사 이후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의 참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 공과

를 파악해본다.

 

1~3대 재임 (1948년~60년)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은

세계 2차 대전과 냉전체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은 내부의 혼란속에

낙후되고 침체된 국민생활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건국과정에서 임정세력의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한 체, 일제 때

주구노릇을 했던 친일파들을 척결하지 않고 오히려 등용했다. 특히 부패와 무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장기독재를

위해 1960년 3.15부정선거를 실행 하였다가 이에 항거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19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하야하고 제1공화국은 붕괴 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정 확립,

 

1945년 2ㅏ차대전 종전 직후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로 진출해 군정을 확립한 상황에서 남북한이 분단되고 냉전체제가

본격화한 상황에서, 또한 몽골이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화되고 1949년 중국마저 공산화된 상황에서, 독립은동의 상징

적인 지도자인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일제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수습하면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확립하였으며, 조선과 대한제국, 임정을 계승

하는 역사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1948년 5.19총선이나 7.17제헌을 포함한 모든 건국 절차를 진행하고 마침

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정치와 경제의 양대 축으로 삼았다.

한편 대통령중심제와 삼권분립에 따른 입법부와 사법부의 확립 그리고 중앙정부및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론의 자유도 거의 완전한 수준으로 보장했다. 국토재건과 경제개발의 기치를

들고 기획처와 부흥부를 설치하여 한국최초의 경제개발 7개년계획 중 전반 3개년 계획을 작성, 1959년 발표 하였고

본격적인 경제개발의 청사진으로 활용했다.그리고 국민경제를 위해 미국에서 수심억달러의 원조를 받아 건국작업에

투입했고, 집권 동안 평균 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1950년 봄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땅이라고는 가져

보지 못했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골고루 자기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토지개혁과 비슷한 형태로 취해진 귀속재산불하로

신흥 상공업 세력이 급속하게 성장하기도 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벌어진 남북전쟁으로 수많은 국민이 죽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되다시피 됐으나 그런 가운데도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얻는 한편 미국과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과 국가안보의 기반을 확립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과 철저하게 대치 하면서 한국전쟁 이후에

국토관리와 방어선을 확고히 해 두고자 1952년 전쟁의 와중에서도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는 해양주권선을

발표하여 독도영유권을 확립히였다.

 

 

경험부재와 소신결여로 실패한 장면 정권

 

1960년 제1공화국이 4.19혁명으로 붕괴하자 제2공화국이 성립하여 장면정부와 민주당 정권이 의원내각제를 체택하면

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의원과 참의원의 국회 양원제를 구성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여 풀뿌리

민주주의의 선례를 남겨 1991년 제시행때 큰 도움을 주었다.(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윤보선 이었으나, 그는 명목상의

대통령이지 국정의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외교나 국방에서 이전 정권과 큰 차이없이 일정한 지속성을 유지 하였

으며, 국가경제의 부흥을 위해 경제개발 제1주의를 천명하고 이승만 정부가 수립한 경제개발 7개년계획에 의거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장면정권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어서 그 한계가 뚜렸했고, 당내 파벌과

극심한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국정운영결여와 소신의 부재로 인해 9개월동안의 집권기간 중에 3차례의 전면개각을

해야 했고, 기록된 가두시위만 해도 2천여여건에 117만명이 참여했고 나중에는 초등학생들까지 동참할 정도로 시위의 나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다 이듬해 성장률이 2.1%로 떨어지는 경기침체 속에 물가가 38%이상 치솟고, 실업률이 23.7%에

달해 국민생활과 경제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그 막을 내렸다.

 

 

중략

 

 

13대재임 1988~93년

노태우 대통령 (1932~   )

북방정책을 통해 지구상 거의 모든나라와 수교하여 교역과 문화교류를 활성화 하였으며, 초대형 국책사업을 펼쳤다.

새 헌법에따라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6공화국이 출범 하였으나 여소

야대의 소수정권으로 출발하다보니 국정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등의 이른바 3김 정치가

현실을 주도 하였다.이에따라 국정 장악력의 취약으로 고생하던 노태우와 민주정의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민주당)

및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정계개편을 추진하여 1990년 1월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들어냈다.

당시 김대중과 평화민주당(평민당)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았겼고 1992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도

패배했다.

군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통치기간이나 국정 전반에 군부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지속되었다. 게다가 대기업

편중과 물가상승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서서히 고조되어 갔으며, 재벌소유집중 완화 토지 공개념 실시 등이 이루어 쪘으나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임기 후반에 가서는 권력형 비리가 잇달아 생겨났고,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기가 노골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사회운동과 노동운동도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또한 전민연 전대협 전노협 전농 전교조등의 진보좌파 진영의 조직화와 전면 등장이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이전의

좌익과 달리 국내에서 자생한 종북좌파세력인 주체사상파(NL) 들이 발호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종북좌파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 직선제 확립과 건설 및 국책사업 추진,

 

노태우시절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특징이라면 대통령 직선제로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달성된 것이며, 대통령 5년 단임제,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국정감사권의 부활 등이 채택되어 민주주의의 색채가 한층 강화되었다. 그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을 거쳐 오늘에 이르면서 대한민국은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가 확립되었다. 특히 점진적

민주화라는 흐름 속에 등장한 노태우정권은 5공청산과 광주 민주화운동의 해결이라는 국민적 요구과제를 않고 출범해

상당한 성과를 만들어냈고, 당시 5공비리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의원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하여 연평균 8.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주택 2백만 호 건설사업을 추진

하여 분당, 산본, 일산, 중동, 평촌 등 5대 신도시가 생겨나고 수도권에대한 충분한 주택 보급을 실현했다.

또한 이 시기에 인천공항, KTX, 고속철도, 새만금 사업 등 굵직굵직한 국책사업들이 결정되고 집행에 들어갔다.

 

북방정책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대한민국이 세계속에 등장하는계기를 만들었는데, 1985년 소련의 개혁 개방과

뒤이은 공산권의 붕괴와 민주화가 확산되자 그는 북방정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과도 수교와 교역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하는등 한국의 활동무대를 전 세계로 확장 하였다. 그리고 호주

와 더불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창설을 제창하여 한국이 처음으로 국제질서기구의 창립을 주도하고 성사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대립의 완화나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여전히 별다를 진전이 없었다. 게다가 1989년 문익환목사 방북사건 곧

이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평양축전 참가, 1988년 밀입북한 서경원의원 사건의 현안화 등으

로 인해 공안정국마져 조성되었다. 이런와중에도 노태우 정권은 그해 9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서울에서

제1차남북고위급 회담을 개최했으며, 1992년 2월 평양에서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

하여 지금까지도 남북한간 가장 내실있고 구속력 강한  지침이자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글쓴이  현경병

1962년 경북영천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행정학,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는 정책학을 전공했다.

제 92회 행정고시, 18대 국회의원(한나라, 서울 노원갑)을거쳐 현제 재단법인 한국지식문화제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치, 역사, 문화예술에 관한 칼럼들을 블로그(http://blog.naver.com/hgb408)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으며,

<브렌드코리아.com> <대한민국 초남단 이어도>등의 책을 집필했다.

 

이 기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과 나의 대통령의 일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잡지를 참고 하세요.

 

글 현경병,   담당 김성훈 기자,   디자인 이가희 기자,

 

무단전제및 배포를 금합니다.

 

 

**본문은 epika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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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교육부분입니다.(본문은 Tomorrow 기사와 무관합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고하는 힘을 빼앗기고

사는 현대인들

 

사람이 자제하는 능력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실수를 몇 번 하면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왜 소리를 질렀지?'

'왜 내가 조급하게 생각했지?'

'어째서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지?'

그렇게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살면 결국 고통과 후회만 남기 때문에

미리 심사숙고해야 하고, 욕구를 자제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요즘은 다들 바빠서 뭔가에 골똘할 수 있는 여유도,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텔레비젼이나 컴퓨터

게임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번으로 사람들은 1차적으로 드는 생각만 하지,

다시 되씹는 2차적인 생각은 하질 못합니다.

 

예전에 중국과 한국사람들은 장기를 즐겨 두었습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싸우는데, 왕이 있고, 왕을

지키는 신하士가 있고 병거車도 있고, 대포包도 있고, 말馬도 있고 코끼리象도 있고 졸병卒兵도 있습니다.

장기판안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서로 깊이 생각하면서 장기를 둡니다.

상대편에서 상象이 나옵니다. '왜 나왔을까? 차車에게 죽을텐데, 음, 뒤에 포包가 때리려고

기다리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수 한수를 둡니다.

이런 방법을 써보고 저렇게도 작전을 펼침니다.상대방이 어떤 수를 둘지 생각에 깊이 잠겨 있으면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왜 장기짝이 안움직이냐?' 하고 신경전도 폄니다.

장기를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설렁설렁 두면 상대방이 파놓은 함정에 금방 걸려 듭니다.

상대방의 작전을 파악한 다음에 대응해야 합니다.

 

나중에 올리겠지만  '홀리오' 라는 청년은 20년동안 마약을 하면서도 전혀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돈만 생기면 마약을 했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상한 빵을 먹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쩌다 마약중독자가 되어 좋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내 차나 집도 한번 갖지 못한 채 독신으로 죽겠구나! '

몇 달러만 있으면 따듯한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데도, 마약에 돈을 다 써버리고 쓰레기통의 상한 빵이나

주워먹는 자신의 모습이 처음으로 비참하게 느껴 졌습니다.

'내가 병들면 누가 나를 병원에 대려다 줄까? 내가 죽으면 누가 슬파해 줄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니 자신이 너무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홀리오가 그런 사고를 하지 않았다면

평생 마약중독자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해 보니 전과 다른 마음이 들어왔고,

그 마음이 삶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다시 마약 학교에 들어 갔을때에 선생님의 이야기가 비로소 마음에 들려와,

그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마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줄이겠습니다. 한시간이 훨씬 넘는 강의를 조금씩 쪼개서 올리니까

때론 이해하시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보일 수 도 있겠구요.^^

이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