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통령,
대통령 선거가 몇일 남지 않았다.
과연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내가 원하는 대통령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유권자의 권리이지 어떤 매체가 먼저 판단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절대 금할 일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성큼 다가오면서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이력을 지닌 후보들 간의 공방이 뜨겁다.
후보들의 국정운용능력과 정책공약을 살펴보는 일과 더불어,
역대 대통령의 참모습과 그 공과를 정확히 비교해 보는 일은
이번 선거에서 옳바른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지난호에는 건국이후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까지 되돌아보았고,
이어 이번호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누무현 대통령의 치적을 알아본다.
본 칼럼을 통해 어떤 인물이 대한민국을 잘 이끌 것인가를
선정하는 나름의 기준을 확립하고, 이번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시민으로서 소중한 권리이자 의무인 한표를 꼭 행사하기 바란다.
제 14대 제임 1993~1998년
김영삼 대통령(1927~ )은
결단력이 단연 돋보인 지도자 였다. 문민정부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군부독제를 완전히 정리하여 민주화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여전하여 각종 비리사건이 이어졌는데, 특히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은 소통령으로 불리며 발호하는 등 국정에 혼란을
초래 하였다. 경제환경의 악화와 더불어 노동법파동과 함께 한보 사태, 기아차 사태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에 이어 아시아지역의 금융위
기가 한국으로도 파급되면서 급기야 1997년 말에는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는 임기종료를 앞둔 그의 치적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깨끗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
김영삼은 1992년 12월 실시돤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국민당 정주영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
되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 하였다. 제 6공화국의 2기에 해당하는 김영삼 정권의 출범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 출신 대통령이 국가를 통치해온 이른바 군부정권을 청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김영삼은 취임후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민주화 개혁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무엇보다 집권 초까지도 군부를 장악해
한국사회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던 하나회를 숙청하고 불법을 저지른 군인들을 처벌함으로서 30년 넘게 이어지던
군부통치를 일소하며 완전한 문민정권 수립을 완료했다. 1993년에는 공직자윤리법을 전면 개정하여 4급이상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의무화 하도록 했다. 뒤이어 정치자금법을 개정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차명계좌를 딘속및 처벌했고, 토지
거래 실명제 등을 잇달아 실시함으로서 맑고 깨끗한 나라를 위한 제도적 기틀을 다졌다.
그는 9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만큼 누구보다 의회 주의자 임을 강조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모두 선출하는 4대 지방선거를 확대 실시하여 풀뿌리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전하게 뿌리내리게 했다.
또 정치개혁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와 신한국 건설을 기치로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1995년에는
5,18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 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5,18사건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격상하여 교과서에 싣도록 하였으며 12.12
사태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법에 따라 심판함으로서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구속되어 처벌 받기도 했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추진하면서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시키는 한편 국립현충원에 임정요인의 묘소를 신설
하도록 하였으며, 서울 한복판을 가로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의 명문화 등을 추진했다.
그밖에 언론과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여 반정부와 사회비판적인 표현을 전면 허용 하였으며, 이전 정권에 의해
갇힌 사람들을 석방 하였다.
경제발전으로 선진국 진입, 남북관계 개선에도 노력
재임 기간에는 국영기업체의 민영화 등을 포함하여 시장경제에 충실 하였으며, 경제발전도 지속되어 연평균 7,4%의 경제성장률
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11,735달러를 기록함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1만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6년
에는 선진국 진입의 관문으로 여겨지던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29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가입하여 본
격적인 선진국 시대로의 진입을 이뤄냈다. 그리고 1995년에는 국토 최남단인 이어도 해양종합과학기지 건설에 착수하여 2003년
완공한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치켜세우며 취임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을 정도였다. 1994년에
는 마틴 루터 킹 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평화상인 '마틴 루터 킹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상도동 자택과
거제도 땅, 거제도 생가를 포함한 전 재산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은 남북관계의근본적인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하였고, 당시
북한의 핵 포기와 개방정책 도입과 같은 혁명적인 내용들이 합의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부총리급의 실무접촉을 통해 모든 실
무적 문제에 합의하고 회담을 눈앞에 두고 있던중 1994년 7월 갑작스런 김일성의 죽음으로 회담이 무기한 연기되어 역사적인
아쉬움을 남겼다.
중략
16대 제임 2003~2008
노무현 대통령(1946~2009)
너무나 소탈한 지도자로서 한국사회에 탈권위화를 촉진하였으며, 비 주류 출신이 국정을 주도한 선례가 되었다. 물론 노무현은
2004년 열린우리당을 창단하는 무리수를 벌였으나 더욱 무리한 한나라당의 탄핵추진으로 총선에서 승리하며 다수여당을 만드
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임기 내내 편가르기와 대립에 휘말려 지내야 했다. 또 언론이나 검찰과도 지나치게 대립하
며 상당히 수세적으로 시달린 편이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 관계법 등 이른바 4대 개혁법안을
밀어붙였지만 여야간 대립 끝에 적당히 타협되는 선에서 갈무리되어 결과적으로는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특히 주가폭등에
이어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공언하며 여러 부동산 대책을 강행했지만 오히려 부동산 폭등을 초래했으며, 그중에서도 서울 강남
3구의 폭발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을 가져 왔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느낀 체감경제가 워낙 나빠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을 기념해야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로서 역대 대통령들의 지도 아래에서 국가가 움직였고 국민은 이와 함께 했다. 이들은 오
늘의 조국이 있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전 세계가 인정하듯 대한민국의 영광과 성취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마다 그 시대적 과제가 있었으며, 각자를 상징하는 시대적 사건들과 더불아 트레이드마크 격인 대표치적이 있기도 하다,
물론 재임중에는 대통령에게 보다 나은 국정을 요구하고 그 잘 잘못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 할 수 는 있다. 그렇지만 막
상 퇴임을 하면 우리 손으로 뽑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우리를 위해 국정운영에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국민의 모습인 것이다. 특히 외로운 지도자의 자리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대한민국을 이끌어준대 대해
서는 경의를 표하는 것이 먼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근들어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이승만 동상, 김대중 컨밴션센터, 박정희 기념도서관 등의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
스럽다. 앞으로 더 많은 기념관과 박물관이 세워지고, 공항이나 거리를 비롯해 공공청사나 군함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차원
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이름이 들어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전국 곳곳에 자리하게 될 전직 대통령들의 흔적을 보면서 우리국민
대다수는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우리 후손들이 보고 배울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것이다.
끝으로 이번 선거에서 훌륭한 대통령을 선출하여 보다 나은 우리의 앞날을 그려줄 것을 바란다. 이를 위해 역대 대통령들을
바라보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갈것인가를 선정하는 몇가지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잘못과
허물만을 거론하면서 흠집내기와 반대를 하기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처럼 국정운영능력과 정책공약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
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대통령후보를 부각시켜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앞장 섬으로서 그의 당선을 위해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오는
19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일에는 민주시민으로서 소중한 권리이자 의무인 투표를 반드시 행사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현경병
1962년 경북 영천 출신으로 성균관 대학에서 행정학,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는 정책학을 전공했다.
제29회 행정고시, 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서울 노원 갑) 을 거쳐 현제 재단법인 한국지식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치, 역사, 문화예술에대한 칼럼들을 블로그 blog. naver.com/h9b408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으며 ,<브랜드코리아COM>
<대한민국 초 남단 이어도>드의 책을 집필했다.
이기사는 역대 대통령과 나의 대통령 인터뷰의 일부 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잡지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무단전제 및 제 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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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강의 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물셋에 교도소에 들어와서 젊은 날을 고스란히 감방에서 보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웠습니다.
혼자 외롭게 있는것이 괴로웠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다면
대화할 상대가 한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들이 떠오르고,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몹시 가슴 아팠습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면회도 않되는, 독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쳐야 한다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교도소에 사형 집행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한 사형수가 처절하게 발악하며 끌려가는데,
전날까지만 해도 담배꽁초 하나로 싸우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돌아다니던 그 사형수였습니다.
꼭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렇게 가고 말 것을 내가 왜 그렇게 살았지?'
그는 지난 삶을 돌이키고 새 삶을 찾고 싶어 졌습니다.그리고 얼마 후,
그의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은 형을 다 마치고 출감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짧게 올렸습니다.
참고로 김기성은 실존 인물이며 지금은 아주 훌륭한 분이 되어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 고 있습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그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지요
사연이 많지만 모두 설명할 수 는 없기에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성원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