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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드림팀.

epika2 2013. 3. 11. 11:22

 

정부 드림팀,  앞으로 대한민국의 장래에 역사를 돌아보고,

이런 인물들이 나라를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기사를 작성해 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모두 마음을 모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2월 25일 박근혜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출범한 새 정부는 정부 조직개편안 처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

가 지연되며 인선에 난항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가서 최고의 왕과 정치인들을 대려와 그

빈자리를 채워보는 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 5백 년>의 저자로 유명한 극작가

신봉승 선생의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에 기초해 조선의 왕과 명신名臣들로 짜여진 대한민국 정부 드림팀을

꾸며 보았다.

 

 

2013년, 대한민국이 조선을 밴치마킹해야 하는                                                                                     

2월 25일 취임식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으로 임기를 시작한다.이번 정부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지만 일각에서는 '반쪽정부'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신

설되고,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육부', 외교통상부는 '외교부', 지식경제부는 '산업통상자원부'등으로 명칭과 업무가 바뀌는 정부

조직 개편안과  총리  및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의  처리가  지연  되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임명된 장관이 한 명도  없이

새 정부가 시작 되는 것은 헌정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사회 현상의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 그 중에서도 역사학은 사회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나열한 기록이 아니다. 인류사회의 발전과 관련있는 의미있는 사실들에 대한 기록과 해석

을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역사 기록을 퍼즐처럼 맞추다 보면,  자연스레 지금까지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고 미래에는 어떻게 흘러갈지를 보여주는 지도가 나타난다. 역사에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의 인재 선발과정을 살펴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능력은 기본, 도덕성까지 갖춰야                                                                                                           

조선시대의 인재 선발에 있어 가장 일반적인 과정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과거제도科擧制度 였다. 당시 서양에서는 혈통과 신분으

로 인재를 등용 했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던 만큼 과거는 전 세계적으로 선진화된 인재선발 시스탬

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응시자는 평균 6만 3천 명이었다.  그중 33명 에게만  합격의 영광이 주어 졌으니 경쟁률만 해도 무려 1900

대 1에  이를 정도로 치열했다.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0대의 중 초반, 유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이가 대게 5세 무렵이니, 무려 25년

이상을 공부에몰두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석인 장원壯元을 차지하기 까지는 모두 세 번의 관문을 거쳐야 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 에서 200명을 추려 냈고,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서 최종 합격자 33인을 뽑았다.  그리고  왕이 주관하는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합격자의 순위가 결정 되었다.  이

처럼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들이  조선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인재풀pool을 이루었다. 조선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전공분야가  세밀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았으며,  국정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소양은 사서오경을  통달 함으로서 습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처럼 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 등으로 분야를 나누기 보다 전체를 아우르는 지식, 사물과 현상을 살피는 철학적

안목을 갖추었느냐가 인재 선발의 기준이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청렴하고 도덕적인 데다, 임금의 잘못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간언하여 바로 잡으려는 기개를 갖추고 있었다.

세종때 영의정을 지냈으면서도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았던 유관柳寬 1346~1433,이나  자신의 상소를 받아 들이지 않겠거든 차라리

목을 치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고 대궐 뜰에 엎드려 상소를 올린 조헌趙憲1544~1592,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마시는 일이 겁나면 감히 선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조선의 분위기였다.

지금도 변함없는 인사만사人事萬事의 원칙                                                                                

'인사人事 가 곧 萬事' 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인재를 뽑아 적재 적소에 활용해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의미다. 승진이나 임명

등 조직개편이 있을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사자성어 이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에도 적용된다. 역사 학자들은 하나같이 세종과 성종 시대를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로 꼽는다. 세종과 성종은 본인

들이 인품과 비젼을 겸비한 리더 였기도 하거니와 훌륭한 인재를 잘 가려쓰는 데도 능했다. 세종때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변개량.

정인지, 성삼문, 장영실, 최항 등은 조선을 통틀어 최고라 해도 손색없는 인재 들이었다. 성종 때도 김종직, 김심언, 손순효, 조위 등 명

신들이 왕을 보필 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로 관직에 오른 인재들 중 여러 자리를 거치며 실무경험을 쌓고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 받은 사람이 판서, 오늘날로

치면 긱 부의 수장인 장관에 오를 수 있었다. 판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마치면 정승(총리)도 될 수 있었다. 능력있는 실무자가 승진 하는

시스탬으로, 요즘처럼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쓰거나 장관 한번 하고나면 쫓겨나듯 물러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능력과 청렴함에 근거하여 인제를 썼던 조선시대의 인재 등용과정은 오늘날 공직자는 물론 CEO와 리더, 젊은이들이

 꼭 알아야 할 대원칙 이라 하겠다.

 

 

 

2013년 3월 현재 정부조직 개편안이 처리되지 않은 관계로 이전 정부부처 기준으로 인물을 선정했다.조선시대는

학덕을 갖춘 사람이 여러부서의 관직을 거치는 만큼, 여기 소개된 인물은 어느 부처의 장관이 되어도 충분히 임무

를 감당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봉승 선생의 설명이다. 조선 시대에는 출중한 여성도 많았지만 관직을 경험한 사람

이 없기 때문에 선발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성군의 대명사, 태종과 원경황후 민씨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어나 1418년에 즉위 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최고 업적이며 그밖에 경제, 과학, 문화, 예술, 국방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황희등을 등용해 국

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성삼문등 젊은 학자를 발굴 하는가 하면, 장영실과 벅연을 발탁해 과학과 음악을 정비했다.

 

 

 태종의 여덟번째 왕자 익녕군의 4대손,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세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

다.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를 보필 하고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수습하는 등 국난 극복에 기여 했다. 근검 절약하는

청빈한 생활로 황희, 허조 등과 함께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오성과 한음'의 오성으로 친숙한 인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병조판서가 되어 올바른 정치로 임금을 보좌했다. 삼정승

을 모두 거쳤으며,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다 관직을 삭탈 당하고 북청으로 귀양 가던 중 얻은 중풍으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정부와 국회 정당간의 갈등을 풀어 나가기에 더 없이 적당한 인물.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교육가로 시 詩, 서書, 화에 모두 뛰어났다. 34세때 문과 급제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형의 죽음 이

후 낙향해 성리학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평생 연구한 학문을 담은 <성학십도>를 왕에게 바쳤고, 사후 영의정으로 추승된

퇴계 이황의 업적과 인품은 정부의 첫 조직인 기획 재정부장관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려서 부터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우계 성혼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예 禮야 말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이라고 본 그는 조선 예학을 집대성, <가례집람>을 편찬했다. 그의 학문과 사상, 실천 의지가  우

리 교육과학기술부에 정착 된다면 교육의 백년대계가 바로 잡힐 것이다.

<중략>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 부터 다양한 학문을 배우며 실천적, 비판적 의식을 지닌다. 중종 15년 초시에 급제 했으나.이듬해 문과

복시에서 낙방한 후 출세를 위한 학문에서 벗어나, 유학의 본질 탐구에 매달린다. 세명의 임금에게 부름을 받았음에도 관직에 오

르기를 거부 하였으며, 왕의 잘못이 있을 때는 이를 열거하며 선정을 베풀것을 충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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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신봉승                                                                                                                      

1933년 강릉출생, 방송작가, 소설가, 강릉사범학교와 경희대 국어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조선왕조 오백년>

<이동인의 나라> 등 역사 소설과 역사 에세이, 시집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역임 했다.

현재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 교수.                                                                                               

 

 

*이 기사는 '조선 촤고의 왕과 정치인이 모두 모였다! 2013 대한민국 정부 드림팀'의 일부 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잡지를 참고 하세요.                                                                           

 

 

                                                                 

대한민국, 정말 잘 지키지 않으면 않되겠다는 소망으로 포스팅 합니다.

인사 만사라는 말처럼 정말 존경 받을 만한 분들이 그리고 능력있는 분

들이 나타나 주길 바라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