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청소년 정책 고문, 이매뉴얼 돌로,
인터뷰,
라이베리아 대통령 청소년 정책고문, 이매뉴얼 돌로
Emmanue Dolo (아버지가 물려 신 최고의 재산
선친을 향한 이매뉴얼 돌로 고문의 존경과 사랑은 각별하다, '근면 성실'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
셨던 아버지. 광산 회사의 경비원 이었던 아버지는 서른 명이 넘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날마다 새
벽같이 일터로 향하곤 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뒷 모
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 하다고, 가난만은 결코 자식에게 물려주기 싫었던 아버지가 맏
아들에게 가르쳐 주려했던 삶의 자세는?
지독하리 만치 성실 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새벽 4시 45분, 내 기억에 아버지는 20년 넘게 한번도 기상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전날 아무리 힌들거나 피
곤한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4시 45분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 하셨다. 아버지의 직장은 어느
외국계 광산회사, 아버지는 그 회사에서 경비 일을 맏고 계셨다.(공교롭게도 나는 현제 그 회사의 부사장이다.)
근무복으로 갈아 입으신 아버지는 맏아들인 나를 깨워 앉혀 고는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매뉴얼 어제 학교에서는 별일 없었니?"
"수업시간에는 무얼 새로 배웠니? 친구들이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혹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면서 막힌 부분은 없어?"
아버지는 당신의 작업화를 닦는 일도 시키셨다. 아침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에야 아버지는 일터로 향하셨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는 좀처럼 쉬는 법이 없었다. 집안 구석 구석을 살피며 청소나 세탁 집안
수리 등 일할 거리를 찾으셨다. 아버지가 키워야할 아이들의 수는 나를 포함해 무려 십 수 명, 일찍 돌아가신 삼
촌들의 자식들까지 모두 아버지가 떠 맡으셔야 했으니 아버지가 짊어지셔야 했을 삶의 무게는 이만저만이 아니
었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더 낳으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키워
낸 자식들의 수는 33명이나 된다.
어머니는 아버지 보다 훨씬더 일찍 일어 나셨다. 학교 문턱이라고는 가 본 적도 없는 어머니셨지만 부지런 하기
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새벽부터 여러 농장 을 돌며 야자술과 농작믈을 떼어다가 시장에 내다 파셨다.
또 손수 밭을 일구어 쌀과 감자농사를 짓기도 했다.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 형제 자매들을 키워내신 어
머니는 가족에게 있어 더 없이 든든한 기둥이었고, 특히 내게는 공부하며 감히 한눈을 팔 수 없게끔하는 채찍질
과도 같았다.
하루 수면 2시간 반, 난민 출신 유학생의 생존 전략
학창시절, 나는 결코 톱TOP은 아니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단 한번도 1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
스로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자부한다.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
를 통해 체득한 성실한 자세 때문이다.
라이베리아의 독제자 세뮤얼 도Samuel Doe 대통령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 갔
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나는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 등 여러학교에 적籍을 두고 공부했다. 어려서
부터 체계적인 교육 시스탬의 혜택을 받으며 자란 미국 학생들, 그리고 세계 각 국에서 모인 인제들이 나의 경
쟁상대였다. 그에 비해 나는 외국인, 그것도 조국이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난민refgee 신분이었다.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아니, '열심히' 공부 했다기 보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미국사회 자체
가 원래 경쟁이 심한 곳인 데다,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의 경우 몇 배는 더 열심히 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굉장히 많은 시간을 공부했다. 공부량에 따라 달랐지만 거의 매일 하루 한 시간 내지 두시간 반 정도 부족한 잠
만 보충해가며, 공부에 매달렸다. 하루 서너 시감만 잘 수 있어도 굉장히 행복할 정도 였다.
다행히 조교teaching assistant를 하면서 학비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 프로잭트를 진행하고 정신병
을 앓는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아 남기 위해 절박하게 공부했다. 미국에 온 만큼 꿈을 꼭 이루고 싶었
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에 나는 지난 2003년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
를 딸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명예 경제학 박사, 이학 석사 등 모두 네개의 박사 석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
지 세권의 책을 냈고, 70여 편의 글을 학술지에 기고했다. 내가 이처럼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자식
들과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아버지가 인생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들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데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그리고 서른명이 넘는 자식들까지 돌보느라 평생을 빈
털털이로 사셨던 아버지, 하지만 내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재산을 물려 주셨다. 바로 금면과 성실
이다. 지식이나 기술은 쉽게 배울 수 있지만 마음은 쉽게 배울 수 없다. 누가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
다. 오랜시간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채득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취업을 위해 면접시험장에 들어 갔다고 해 보자, 여러분의 이력서에 적힌 스팩은 화려 하더라도 여
러분의 자세나 태도가 잘못되었다면 그 조직 내의 문화에 동화될 수 없다. 성실, 타인을 향한 존중, 절제, 겸
손, 인내 등 올바른 가치관은 오랜 시간을 거쳐야 형성되는 삶의 자세이다.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은의 자
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버지 밑에서 부지런한 생활습관을 익힌 덕에 나는 '아침형 인간early riser'으로 하루을 시작하며 시간을 낭
비 하지 않고 쓸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 5시에 기상한다. 청소를 하고 아침을 준비
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직장과 학교로 보낼 준비를 한다. 내 옷이나 아내와 아이들 옷을 다림질 하기도
하는데, 여자 옷은 역시 다림질 하기 힘들다. 하지만 아이들 에게는 "엄마 한테는 다림질 부탁하지 마라"고 한
다. 아내가 결국 내게 다림질을 맡기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시각은 오전 6시 20분
출근한 뒤에는 대게 저녁 8~10시 까지 사무실에서 일한다. 평균 수면 시간은 많아야 5시간 정도 업무가 많을
때면 잠깐 눈을 붙인 뒤 일어나서 다시 일을 한다. 특히 조용한 밤에 집중이 잘 되고 글도 잘 써진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내게 '어떻게 하면 시간을 잘 관할 수 있느냐며?' 묻는다 사실 공직자로 회의에 참석 하거
나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늘 예정된 시간을 넘겨 내 업무를 처리할 시간을 뺏기기 일수다, 업무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스케줄 자체보다 자투리 시간이나 자유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나는 출근할 때 착용할 옷과 양말, 신발 등을 전날 밤 준비해 둔다. 그래야 다음낭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스케줄을 빈틈 없이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시간도 꼭 지키는 편이다. 내가 늦으면 그만큼 상대방은
기다려야 하고 그만큼 시간을 손해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스케줄을 항상 꼼꼼이 챙긴다. 모두 아버
지로 부터 배운 지혜다.
여러분 속 가능성의 씨앗을 틔우고 싶다면
지난해 부터 나는 엘렌 존스 설리프 대통령의 청소년정책 고문으로 있다.아프리카 첫 여성 대통령으로 2011
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설리프 대통령은 대하면 대할수록 훌륭한 정치인 이라는 생
각이 든다. 재무부에서 다년간 근무하며 차관을 거쳐 장관에까지 올랐고 세계은행, UN, UNDP 등 국제기구
근무 경험도 풍부하다. 그분의 인생에는 유난히 많은 핍박과 도전이 있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독재전권 하
에서는 두 번이나 옥고를 치러가며 맞섰고, 7년 넘게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노벨상 수상경력은 그분의 수 많
은 이력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 사회 소외계층에게도 변화를 일으킬 기회를 주고 싶다. 라이베리
아는 그리고 아프리카는 변할 것이다. 식민 지배를 받으며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 아픈 역사야 말로 아프리
카의 가장 큰 자산이다.
청소년과 소외계층을 돕는 다양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이따금씩 우리 가정과 아프리카 대륙을 함께
떠올려 본다. 부모님이나 나는 가진 것도, 내세울 장점도 없었다. 그저 남보다 열심히 해서 돋보이는 것 외에
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프리카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개인이든 나라든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약할 때, 가능성의 씨앗을 틔울 방법은 상실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느 새 넉 달이 지났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일터로 향하시던 아버지의 수십 년전 아버지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 떠 오른다. 여러분에게 부모와
조상이 있었기에 지금 여러분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
이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있는 법니다.
이 글을 읽는 청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기를 빕니다.
후원으로 물을 받은 토고의 밝은 얼굴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기를 빕니다.
한글 교제를 받고 기뻐하는 카메룬 학생들.
부연 설명 없이 그림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