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핀 희망의 꽃
Campus 행복한 꽃송이, 유송이
TW기획 절망 속에서 핀 희망의 꽃
대한민국 청소년들 중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는 10명중 3명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조사된
바 있다.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왈따'가 심각한 사회 문
제로 드러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학교 울타리 속 '왕따 사건은 피해
학생들에게 상당한 고립감을 맛보게 하여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한다. 친구들에게 '왕따'
를 겪은 적이 있다는 유송이씨 또한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어두
운 터널을 벗어나 정상적인 마음을 갖기까지 톡톡히 치러내야만 했던 그녀의 분투기를 소개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춘기 중학교 3학년생 유송이는 그 시절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상의
세계가 현실에서 펼쳐져서 결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었던 때였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인
생의 소낙비와 같은 열병을 앓듯이 송이에게 닥친 친구들과의 불협화음이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어둠으
로 파고들어 눈물짓게 했다. 마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맑은 하늘에 먹구름만 끼듯, 당차고 밝았던 유송
이는 '도대체 하루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 왜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지?' 하고 온종일 고민에 휩싸
였다.
"저는 학교생활을 굉장히 잘하는 아이였어요. 학급 회장, 전교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활달하
게 잘 지낸 편이었죠. 선생님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솔선수범하고 열심이었지만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궁금해 하는 엉뚱한 면도 있었죠. 제가 학교에 여자 축구부를 처음 만들고 공을 차고 뛰어 놀
았을 정도 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왕따를 당하고 삶을 거의 포기했죠. 자살이 꿈일 만큼 힘든 시기 였
어요."
점점 풀어갈 수 없던 현실
"문제가 된 사건은 지금 돌아보면 다소 유치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해요. 한 친구에게 정보를 얻어
서 학생들이 다니는 식당이 아닌, 교직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다른 친구들과도 같
이 갔다가 선생님에게 걸렸어요. 선생님이 주동자가 누군지 물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모두 저를 지목했
던 겁니다. 저는 제게 정보를 준 친구 이름을 썼는데 말이죠.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이상한 학생이 된
거예요. 일이 점점 꼬였고 엎치고 덮친 일이 한 두개가 아니었어요.
학교 선거에 나가서 두루두루 다양한 친구들과 친했던 유송이는 하루아침에 퍼진 소문으로 친구들이
그녀와 말하지 않았고, 등을 돌렸다, 급기야 일진까지 합세하여 점점 무리에서 나누어 졌다. 일진의 무
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합세하여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이 유송이를 둘라싸고 심문읗 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갑작스럽게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느낌이 무리에서 이탈되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비 증상 까지 겹쳐
서 근육이 굳어버렸다. 급히 양호실로 옮겨졌지만 그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그녀는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
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말을 걸면 모두 피허고, 같이 밥을 먹던 친구들도 끼리끼리 다니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뒤에서 대놓고 욕을 해댔다.
"제가 운동을 하고 키도 컸는데, 놀리는 친구 하나를 못 때려서 화병이 났어요. 분노와 억을 함으로 몸이
굳어 버렸죠. 그 나이 땐 친구들이 중요한데,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아이들과 그녀 사이를 풀어주려던 담임선생님의 극약 처방도 효과가 없었다. 청소년 상담센터에 맡겨
진 그녀였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송이 그녀가 친구들과 다른 기준을 가졌다는 상담가의
이야기도 그녀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세상이 저를 차버린 기분이었어요. 어느 것도 제 마음에 위로가 안됐죠. 친한 친구도, 부모님과도 더
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세상과 그렇게 단절 된거죠."
"한창 사춘기 반항심까지 생길 때여서인지, 그 누구와도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 스스로 너무
어둡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도 닫고 살았죠, 그때부터 몇 개월, 그렇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자 부
모님이 알게 됐어요, 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어요."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이 돼지 못했고, 다수 앞에서 겪었던 심판 또한 그녀가 견디기 어려웠다. 오히려
대인기피까지 생겨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성악가나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었지만 그 일이 벌어진 이후에는 머릿속이 까만 도화지가 됐
어요. 자주 집 건물 15층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 발목을
붙잡은 것은 부모님의 얼굴이었죠. 내가 죽으면 엄마가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파트 단지 정자
에 앉아서 한없이 생각했어요. 학교는 너무 가기 싫었죠."
고등학교, 링컨학교 입학
부모님이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후, 더는 학교로 가길 권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점점 더 고립됐다.
괴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면 그것을 이길 힘이 없어서 멍하니 텔레비젼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렇게 집에서 지내다가 대안학교인 링컨학교를 소개받아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 처음엔 링컨 학
교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창을 닫고 있다 보니, 그곳에서 만난 친절
한 친구와 선생님의 관심도 부담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던 것.
"다른 학생들은 굉장히 밝게 지내는데, 저는 너무도 어둡고 열등감에 사로 잡혔어요. 나 자신과 스스로
싸움을 많이 했죠.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었죠."
대안학교 선생님들은 어린 유송이가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하나하나 물어 보시곤 했다.
"우울한 마음과 차분한 마음이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생각해보라는 상담을 많이 받았어요. 그
런 연습을 조금씩 하게 됐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친절도 신뢰하지 못하고, 내 등 뒤에서 또 욕할 것이
란 오해를 3년간 했어요."
링컨 졸업식 날, 한 선생님이 화를 내셨는데, 유송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유송이! 넌 왜 널 위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몰라!"
'지금까지 선생님은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정말 나를 위하고 계셨구나!'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애절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사실 대안학교에는 불
량한 학생들도 꽤 있었지만, 그곳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사고의 틀을 벗게 하는 의미있는 일을 했
다. 사회에 분노와 불신으로 무관심해진 학생들을 붙들고 청소하는 작은 것에서부터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법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것이다.
내가 받은 사랑,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2008년 해외봉사 초청 워크숍에서 그녀는 여러 나라를 다녀온 또래 친구,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특히 알래스카는 열 체질인 그녀에게 시원한 동경의 장소
였다. 밤하늘에 펼쳐지는 오로라, 백야 현상, 강에서 연어 떼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
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더 강하게 끌어당긴 곳은 아프리카, 아프리카 베넹에서 희생적으로 삶을 사
는 지부장님의 삶은 그녀를 아프리카로 끌기에 충분했다.
"아프리카에서 오래 사셨던 그분의 정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좋은 환경, 앞선 문명을
누리고 싶어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졌고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전 그런분을 만나서, 사람냄새도 맡고, 정말 배우고 싶었어요."
실제 아프리카에서 만난 지부장님은 참으로 무뚝뚝한 분이었다. 하지만 말보다 삶 속에서 그분의 존재
가 더욱 깊이 있게 다가왔던 것,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시 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
다. 그녀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아프리카이다. 열등감 때문에 친구를 미워했던 그녀가
실제로 지부장님처럼 묵묵히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바쁘게 봉사하는 동안 더 이상의 열등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은 발전해서 어느 거리를 다닐 때 조선시대 누가 다녔을 자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잖아요.아프리카
는 수천 년이 흘렀어도 옛날 사람들이 밟았을 거리임이 상상이 되요.하루 종일 그 땅을 밟으며 인위적
이지 않고 자연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을 다니니 생각도 단순해졌어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하늘과
자연 바로 그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죠. 머래위에 흙집을 짓고 신이 만든 자연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정말 신기했어요."
아프리카에서는 더 이상 그녀의 무늘력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 시골 지방에서 무지하게 살
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배울 수 있었고, 풍요로운 가정에서 성장 할 수 있었던
사실을 돌아보았다.
"초등학교 때 저는 이미 일회용 사진기를 소풍 갈 때마다 꼭 가지고 다녔어요. 첫째 딸이어서 아버지가
여름이면 레프팅에, 겨울이면 스키를 타러 데리고 다니셨는데, 돌아보니 아프리카란 곳은 저와 정말 맞
지 않았죠. 하지만 땅콩 한 조각에도 배부름을 느낄 수 있는 아프리카! 그곳에 다녀 올 수 있었다니 정
말 신기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검은 피부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이들이, 불룩한 배로 하염없이 웃는 아이들
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시는 도시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운치있게 흘러가는 강가도 두 눈에
선하다고.
부모님, 사랑합니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로 사춘기 반항의 시간 동안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에 크게 죄송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너무 무례하게 한 것을 죄송하다고 표현했어요. 아버지는 멋쩍으셨는지 웃으셨어
요. 이제 저는 심각한 스트레스와 고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생각하고 살피게 됐어요. 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요."
얼마전 그녀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병은 때론 가족간에 근심과 불화를 남기고,
지치고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유송이는 병간호를 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고, 자신이 어머니를 향해 가졌던 사랑, 어머니가 그녀를 향해 가졌던 마음.....그런 어려움 속
에서도 오히려 가족은 더욱 가까워지고,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찾아온 암 때문에 그녀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됐고 사람의 마음을 세밀하게 살피게 됐다.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만든 가치있는 아픔이라 여긴 모녀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리고 기적처럼 병이
다 나아서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병으로 매마르고 척박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에 희망과
소망이 꽃피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이제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절만 속에서 더욱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마인드 강의 시간 입니다.
지난 회에선 예쁜 여자와 사귀려면.... 하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예쁜 여자를 어떤 탐나는 물건이나 성격에 맞추어 보시면 어떨
까요.
제 2단계 태만하고 방탕한 마음 두번째 시간
'집떠난 둘째 아들은 기생집 부터 찾아 갔습니다.로 문을 엽니다.
일본어에 '야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굽는다'는 말입니다. 군만두를 야끼만두라고 하지요.
일제 칼과 독일제 칼을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칼로 쳐줍니다. 일본 사람들과 돌깅 사람들은 쇠를
아주 잘 다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만들 때 일본과 독일을 따라갈 수 없는 부
분이 바로 쇠를 다루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은 칼을 만들 때 쇠를 '야끼'했다고 합니다. 불에 달궈서 벌겋게 달아오른 쇠
를 물에 팍 집어 넣으면 '물 야끼'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 쇠가 아주 여물어 집니다. 다시 벌겋
게 달군 쇠를 이번에는 기름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기름 야끼'가 되지요. 그렇게 해서 쇠를
아주 단단하게 만듭니다. 물 야끼나 기름야끼를 한 쇠는 겉은 보통 쇠처럼 보이지만 속은 굉장
히 단단합니다. 쇠가 단단해야 날이 예리하게 선 좋은 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보통 쇠는 숫돌
에 갈면 새까만 쇳물이 나오면서 쇠가 닳아지는데, 그런 쇠로 칼을 예리하게 만들면 몇 번 쓰
면 금방 무뎌져 버립니다. 그에 비해 야끼를 해서 아주 여문 쇠는 오랫동안 숫돌에 갈아도 물
이 하얗고 쇠가 닳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쇠로 칼을 만들어야 아무리 사용해도 그 날카로움이
여전히 유지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연단의 과정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차이가 아주 큽니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마음이 전혀 연단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무
엇이든지 하면 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장차 받을 유산을 미리 달
라고 해서 그 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는데, 도착한 첫날 기생집에서 실컷 즐기고 다음 날부터
열심히 사업을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믿었고 자기의 두둑한 주머니를 믿었기 때
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기생집에서 하루밤 즐기고 나니까. 다음날 또 가
고 싶고, 계속해서 기생집을 찾았습니다.
기생과 놀다 나올 때면 팁을 줘야 합니다. 백만워 짜리 수표 한장을 건넸는데
기생이 "이게 뭐야? 내가 백만 원 가치밖에 않돼요? 이거 애들 과자나 사줘요."
하는 겁니다. 속으로 '백만원이 얼마나 큰 돈잉데...' 하고 떫지만
자기 체면이 깎일까봐 "아. 그게 백만원 짜리야? 나는 천만원 인줄 알았지."
하고 천만 원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기생들에게 돈을 쏟아 붓다 보니 어느덧 돈이 바닥나고 말
았습니다. 기생들은 돈을 보고 남자를 가까이 하니까 돈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박대하기 시작
합니다. 둘째 아들은 돈이 떨어졌다고 자기를 괄시하는 기생에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너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어? 전에는 죽고 못살 것처럼 하더니!"
"돈 가지고 오면 잘 해 줄께요. 나 다른 손님 받아야 하니까 빨리 나가세요."
둘째 아들은 기생집에서 쫓겨 났습니다. 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데, 마침 그 나라에 극심한 흉
년이 들어서 밥을 얻어 먹기도 힘들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일자리를 얻으려 했지만 일을
해본 적이 있어야지요. 농사를 지어 봤겠습니까. 소를 몰아 보았겠습니까? 일자리를 찾고 찾다
가 돼지 치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 돼지 쳐보았어?"
"처음이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 되는데...."
"배워가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배우는 동안에는 밥을 주지 않을 테니까 그냥 일하고, 잘하면 그때 밥을 줄께."
기가 막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돼지와 함께 뒹굴면서, 밥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프
니까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가 절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기생집이라는 방탕한 길로 들어섰고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전하고 끝을 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