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ka2 2014. 10. 23. 22:15

 

 

세종 하면 먼저 세종뒤에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또한 세종이라는 이름의 가장

가까이엔 한글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세종의 리더십에 대해선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

다. 오늘은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Campus      아랫사람이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인제기용법

    TW기획       우리에겐 세종이 있다. (5)                                                      

 

황희, 맹사성, 최윤덕, 장영실 등은 뛰어난 인재였지만 요즘 대한민국 같았으면 청문회도 못 해 보고

낙마했을 만큼 허물과 잘못도 많았다. 아랫사람이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세종 리더십의 비결은? 

 

세종대왕 치세(1418~1450)의 과학기술 연표                                                                                      

 

 

정인지, 성삼문,변계량, 최항, 박연 등 세종시대 인물들의 면면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봐도 최고

라고 할 만큼 알차고 화려하다. 이는 세종이 '절실한 마음으로 인재를 구하되, 비록 내 기준에 맞지 않

는 사람도 나라를 위해 등용한다면 쓸 수 있다'는 인재관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종의 인제 기

용 대원칙을 정리해서 살펴보자.

 

 

첫째,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니 리더는 단점보다 장점을 크게보고 그에 걸맞은 일을

맞겨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청백리로 잘 알려진 황희는 뇌물을 받은 적이   

있지만, 세종은 그의 탁월한 국정조율능력이 재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해 그를 과감히 기용 했다.

장수 최윤덕은 북방으로 쳐들어오는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정승으로 추대되었다. '무관 

출신이라 언변과 글재주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세종은 그를 우의정에 임명했고, 그는 맡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냈다.   

 

 

 둘째, 인재들의 개성과 신념을 존중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한데 모아 더 뛰어난 아이디어를 도츨했    

다는 점이다.학계의 트랜드가 된 지 오래인 통섭과 융합의 원조는 세종이었다. 세종 때의 재상들로는  

황희와 맹사성, 허조가 유명하다, 허조는 볗명이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으로, 매사에 꼬장꼬장하면서 

 도 빈틈이 없었다. 반면 맹사성은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부는 취미가 있을 정도로 유유자적하고  한 

 가한 성품이고, 황희는 그 둘의 중간쯤 되는 인물이었다. 세종은 세 정승의 아이디어를 고루 경청하고  

이를 종합해 백성이 잘살 수 있는 정책을 만들었다.

 

 

셋째, 유능한 인물이 잘 못을 범하더라도 다시 기회를 줌으로서 분발하여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게 했다. 압록강 국경지대 중 한 곳인 여연군 군수 김윤수가 여진족이 침입해 왔음에도 제대로 대처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를 파직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잠시 그의 벼슬 을 빼앗았

  다가 다시 여연군군수를 맡겼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김윤수는 활로 적군

7 명을 쏘아죽이고 빼앗긴 가축과 재산을 모두 되찾아와 세종의 은혜에 보답했다.

 

 

 

 

 

하지만 세종이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정성이었다.

세종 7년(1425)정월, 종묘 제사를 주관하던 이조판서 허조가 술잔을 옮기다 그만 발을 잘못 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술을 뒤집어쓰고 옷이 망가진 허조를 보며 다들 어쩔 줄을 몰라했는데,   

세종이 급히 다가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 하고 물었다. 허조가 계단 위로 올라와 잘못을 빌자, 세 

종은 '허 판서의 잘못이 아니다. 계단을 넓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 자신보다 28 

살이나 어린 임금이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데 감복한 허조는 이후 세종의 열렬한 심복이 되었다. 세종 

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그 날 세종이 배푼 사랑을 잊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며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썼다고 한다.

 

도음말  ㅣ 박현모(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싶연구소장)   사진제공 ㅣ 미다스북스

 

 

 

 

다음은 마인드 강의 입니다.

 

1962년 한 해, 저는 정말 나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저도 어린 나이였지만 내 인생이 무너진 적이 있었습니다. 1962년 봄, 내가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1944년에 태어나서 내가

일곰 살 때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논밭이 황폐해져서 먹고사는게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좋아지기는 했지만 사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저는 직장을 잡기 어려울 것 같아 군대에 가서 기술을 배우려고

소년기굴하사관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앞니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

정을 받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떨어진 후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저는 내가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관학교 입학 시험도 아니고 기술하사관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그동안 믿었던

내 판단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못나고 형편없는 인간인지 알게 되

  었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을 따라서 살면 내가 망하겠다는 사실이 마음에 분명히 새겨

졌습니다.

1962년 봄에 저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내가 착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자꾸

  죄가 드러났습니다.겉으로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마음 속에서 늘 악한 생각들이 꿈틀거

렸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교회를 다니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고 주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왜 죄를 짖고 악한 마음을 품지?'

매일 새벽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회개 하지만, 그때뿐이지

예배당 문을 나서면 속에서 또 죄가 발동했습니다. 그때 저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자주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박옥수 이 나쁜 놈! 이 더러운 놈! 이 야비한 놈아!!"

 1962년 한 해, 저는 정말 나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내 속에서 반항심과 죄가 솟구

치는데 내 의지로, 내 양심으로, 교회에서 배운 성경 이야기로 그것들을 막기에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죄에 끌려서 하루를 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교회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며 내 마음에는 절망만이 가득했

  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어느날, 내 마음에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리고 그날 후부터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일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자기를 믿으면 함부로 살게 되고, 함부로 살면 반드시 망합니다. 망하면 당연

삶이 어려워집니다. 작은 돈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사람들에게 무시와 모욕을  

합니다. 결혼하여 자식이 있는 사람 같으면 아이에게 꼭 필요한 학용품도 사주지 

못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통을 맛보고, 절망감이 마

음을 덮어옵니다. '내가 그 때 함부로 살지만 않았더라면.......'하고 깊은 후회가올라

옵니다.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건방졌으며, 얼마나 무능한지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그런 일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무슨 일이든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다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지혜를 받아 들일 줄 압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의 삶은 복

되게 변 합니다.

사람은 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음의 여섯 단계를 거칩니다. 다음이야기에서는

네 번째 단계인 고통스러워 하는 마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컴퓨터의 이상으로 글의 형태를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세종대왕의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어졌는데, 일부만 올렸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