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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pika2 2014. 2. 5. 14:06

 

People          가족끼리 마음의 대화가 삶에 가장

TW오피니언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행복한 홈 스토리

 

 

전화, 핸드폰, 이메일, 문자, 카카오톡 등 소통의 수단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과는 소통의 부재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양성하고 있는 요즘이다. 대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있지

만 마음은 어디에 있고 어디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시대의 가족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 갈 수 있는지 젊은 세대들이 겪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이혼 가정에서 자란 여학생이 가족 관계를 회복해 가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로 기억한다. IMF로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났고 곧 아빠는 실직자

가 되셨다. 그로 인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엄마는 반찬값이라도 벌겠다며 공장에 취직하셨다. 나와

남동생이 쓸 하루 용돈 천 월을 텔레비젼 위에 놓고 이른 아침이면 엄마는 공장으로 가셨고, 우리는 그

돈으로 가게에서 1백 원짜리 게임을 하며 엄마 오시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젼 위

의 돈이 보이지 않았고, 엄마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며칠 후 집에 오신 엄마는 아빠와 크게 싸우셨다. 아빠는 우리에게 누구와 살거냐고 물으셨는데, 나는

부모님 누구와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아무 말을 못했다. 엄마는 그날 짐을 싸서 나가셨다. 어린 나로서

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매일 돈을 달라고 한 것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서 나가

신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엄마가 다시 오시면 숙제도 잘하고 말씀도 잘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

만 기다리는 엄마는 오지 않았고, 우리 남매는 엄마 대신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다.

 

집을 떠난 엄마, 그리고 들어온 새엄마들

할머니가 잘해주시긴 했지만 내 마음의 빈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엄마없이 보낸 그 시절은

무슨 일을 해도 허전했고, 그 허전함 때문에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 엄마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

지 않아 선생님이 나를 챙겨주셔도 별로 달갑지 않았고, 주변에서 엄마 보고 싶냐고 물어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다'고 하며 감정을 숨겼다. 더욱이 엄마라는 말만 꺼내면 엄마 욕부터 하시는 할머니 때문

에 집에서는 엄마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보고싶은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고, 허전하고 힘든

마음도 감추며 나는 우울한 아이로 변해갔다.

이후 엄마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엄마가 오시면 내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숙제도 잘하고 있었기에 배신감은 더 컸다. '아 이제 엄마는 내가 싫은가 보

다. 나보다 아저씨가 더 좋은가 보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며 엄마를 몹시 원망했다. 엄마의

재혼 이후, 마음에서 친엄마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

시간이 흐르고 초등학교 4, 5학년 즈음 아빠는 새엄마를 들이셨다. 아빠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부분을

새엄마가 챙겨주셨는데, 그게 좋았다. 또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엄마'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새엄마와 잘 지냈다. 하지만 엄마라고 부른 지 얼마 않되었을 때, 아빠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졌고 새엄마도 어느 날 조용히 집을 나가셨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 또다시 사라진 나는 예기치

못한 상실감에 마음의 상처를 더 키워갔다.

아직 젊은 나이에 두 아이를 맡아야 했던 아빠는 주변의 권유로 얼 마 후 다시 재혼을 하셨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내 마음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항상 피곤하다고 하

는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 곧 떠나버리는 새엄마들......

마음 둘 곳 없는 나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점점 나만의 세께 속에 고립되어 갔다, 나도 사

랑을 받고 싶었다. 부모님께 받지 못한 사랑을 친구들에게 내 마음을 다 쏟으며 보상 받고 싶었다. 하지

만 친구들과의 사귐도 내 마음을 근본적으로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

가면 어느 순간 여전히 나 혼자였다. 초중고들학교 시절은 그렇게 너무 외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특

히나 아빠도 할머니도 새엄마도 남동생도 내 생일을 기억해주지 못했던 날의 비참함은 잊을 수 없었다.

내 존재를 반기는 사람도 없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네 번째 엄마는 아빠의 병상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때 지금의 네 번째 새엄마가 오셨다. 아빠가

다시 재혼하는 것이 싫었지만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새엄마는 결국 오셨다. 새엄마가 나에게 잘해

주시는 것도 이제는 가식으로 느껴졌다. 가족이 아니고 그저 동거인 정도로 생각하며 최소한의 필요한

용건만 이야기했다. 대학생이 된 뒤로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기에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고 가족과는 남남처럼 살았다.

대학 2학년 어느 날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달려가 병실에 누워계신

아빠를 보자 '아 이제 나는 어떻게 살지?' 하며 내 앞날이 먼저 걱정되었다. 졸업은 어떻게 할 것이며

남동생은 어찌 돌봐야 하고, 뭘로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아빠의 건강은 안중에 없고 오

로지 내 감정, 내 상황이 중요할 뿐이었다.

만약 아빠에게 장애가 생겨 반신불수로 내게 짐이 된다면, 차라리 그런 아빠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도 했다. 당연히 새엄마도 곧 도망칠 것이라고 여겼고, 빨리 아빠 문제가 해결되어 나도 이 상황에서 도

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새엄마의 모습은 예상과 달랐다. 그동안 새엄마들은 힘들거나 문

제가 생기면 총알처럼 집을 나가셨는데, 네 번째 엄마는 그렇지 않으셨다. 아빠 곁에서 회복을 도우면

서 계속 함께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내 눈에는 가식으로 보였다.쥐꼬리만큼 남은 우

리집 재산을 다 챙겨서 도망을 가려는 건 아닐까? 하며 말이다.

아빠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퇴원하셨는데, 일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셨다. 새엄마는 그런 형편

에도 가정을 지키시려고 많은 애를 쓰셨다. 왜 그러시는지 의아해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도피 위해 떠난 해외봉사, 그곳에서 마음의 빗장을 처음 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내게 해외봉사를 다녀오라고 부탁하셨다. 친구분의 자녀가 갔다 온 것을 보시고

나도 보내고 싶어 하셨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가겠

다고 했다. 봉사보다는 현실도피를 위해서였다. 가난한 나라에 가면 고생이 심할 것 같아 잘사는 나라

미국을 택했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생활은 내 고정관념들을 깨트려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에 적

응하는 것도 어렵지만 30명의 굿뉴스코 단원들과 호흡을 맞춰가는 단체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

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감정 따윈 무시하고 살았다. 하지만 해외봉사활동

중에는 그게 용납되지 않았다. 청소에서부터 교육봉사 활동까지 무슨 일이든 여러 명의 단원들과 함께

해야 했고, 마음이 달라 부딪히는 경우가 생기면 나 몰라라 하고 돌아선다 해서 해결돠는 게 아니었다.

끝까지 마음과 생각을 조율하며 서로서로를 맞춰가야 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선택한 친구들과 분위기를 이끌며 잘 지냈기에 미국에서도 그게 가능할 줄 알았다. 그

런데 미국에서는 나로 인해 분위기가 흐트러지거나 상처 받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가 피해자라고 여기

며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함께 지낸 단원들과 선생님은 이런 내 고집스런 생각이 잘못된 것

임을 지적해주고, 계속 대화를 통해 마음 열기를 바라셨다.

어느 날, 내 마음이 힘든 이유는 내가 남들과 다른 마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처음으

로 하게 됬다. 내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고

통 스러워할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활동하며 알게 된 가정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부모

와 자식 사이가 아주 자연스러워 재혼 가정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빠와 친딸, 새엄마와 그 사이에

서 태어난 여동생이 사는 가정이었는데   언니가 동생을 잘 챙겼고, 새엄마도 큰딸에게 잔소리도 하고

단도 쳤지만 전혀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가족을 바라보면서 네 번째 새엄마를 향해 내 눈이 아닌 객관적인 제 3자의 시각으로 보게 됐다. 아

빠 사업이 어려웠을 때나 아빠가 병으로 쓰러지셨을 때,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 길을 함

께 찾으셨던 새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와 아빠에게 해주셨던 모든 것들이 가식이 아닌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 새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이

야기해주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면 나는 무시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지내면서 이상하게 지난 날에 들

었던 말들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계속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새엄마에게 마음이 열리기 시작

했다.

그러던 9월 어느날 비행기 티켓 문제로 집에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엄마가 전화를 받으셨는

데,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렇게 불렀다. 처음에는 못 알아 들으셔서 '누구세요?'라고

다시 물으셨다. 그래서 다시 '엄마'라고 불렀다. 그제서야 내가 누군지 아시고는 '아, 그래 딸!' 하고 울

먹이시며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아빠는 전부터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동안 한 번

도 부르지 않았던 호칭이었다. '저기요'라고 부르다가 '엄마'라고 부르기가지 만 4년이 걸린 것이다.

막상 '엄마'라는 말을 꺼내놓고 나니 모든 게 아주 쉬웠다. '엄마'라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속에 들어

와서 마음을 몹시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말을 하고 싶

었고, 사랑받고 싶었고, 마음을 열고 싶었는데, 상처를 받을 까봐 내가 그렇게 고집을 부렸구나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엄마는 하루 빨리 나를 보고 싶다며 귀국을 서두르길 바라실 정도로 기쁜 마음을 표현하

셨다. 하지만 나는 예정대로 봉사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기로 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마음 여는 법을 배우다.

굿뉴스코 해와봉사를 가기 전,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피해자는 항상 '나'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모든 생각의 중심은 나였다. 상대방의 호의도 불쌍한 나에겐 당연한

것이고. 상처받고 자란 나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남들이 이해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늘 비꼬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고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다.  만약 해외봉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피해자'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나는 지금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굿뉴스코 해외봉사 이후에 내 삶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마음 여는 법을 알게 되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예전에는 상대방

이 나에게 잘해줘도 '아닐거야, 가식일 거야, 곧 나를 버릴 거야.'라고 여겨 그마음을 그대로 받지 못

하고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게 되었다.

무뚝뚝하던 아빠도 많이 바뀌셨다. 아빠도 그동안 나름대로 마음을 표현하셨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

빠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어려워하며 살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예전보다 자상하게 마음을 펴현해주신

다. 또 예전에는 집에 있어도 가족들과 최소한의 대화만 했는데, 요즘은 집에오면 점심은 무엇을 먹었

는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하루의 일을 마치 초등학생처럼 엄마 아빠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그런 시간이 너무나 좋다.

처음부터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일부터 입을 열어 꺼내보니 가족과는 워

래 이렇게 대화하며 사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친구들이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전

회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모습이 가장 부러웠는데, 이제 나도 엄마와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있을 줄은 기대하지 못했었는데.....

 

문제가 있지만 함께하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집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말로 하기엔 사소하고

창피한 것들이 쌓여 부모님을 오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이 좋고 행복하다.

부모님이 동생만 잘 챙겨주시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거나 나에게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않되는

일이 있으면 혼자 집작하거나 마음에 덮어두지 않고 다 꺼내어 여쭤본다.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떤지,

왜 그러시는지 차근 차근 설명을 내게 해주시니까 마음의 어듬의 침전물이 남지 않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전에 이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다. '설령 네가 친엄마와 살아도 마음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힘들 수밖에 없고, 새엄마와 살아도 서로 마음을 나누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는 없을꺼야.' 정

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엄마 아빠에게 마음을 열고 사

소한 것들이라도 말씀드리라고 전해주고 싶다. '대화'라는 단어는 아주 흔하고 평범한 말이지만 자기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친구로 마음을 위로하고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들었던

적이 있던 나였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 그날의 즐거움을 위해 즉시 다 써버리는 나였다. 하지만 이

제는 그렇 필요가 없어졌다. 나에게도 마음을 함께할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김은혜                                                                                               

2011년 미국으로 굿뉴스코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오며 이혼가정에서 받은 마음 속 상처가 치유되어 본인

의 이야기를 기고해 주었다. 현재 창원대학교 회계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좀 더 긴 이야기를 올리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TOMORROW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올리지 않습니다. 현제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겪으며

아파 하고 안타까워하지만 마음을 열고 서로를 품어주는 오늘의 이야기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과 그런 자녀를 두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