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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2 히딩크,

epika2 2014. 3. 7. 09:48

 

메모의 마술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은 히딩크감독의 메모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히딩크 감독은 과연 어떤 메모를 어떻게 했는가?

어떤 메모를 어떻게 하기에 하기에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서 4강 신화를 이루었을까?

이제 이야기를 이어가 보도록 합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일궈내며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명장 히딩크 그의 손만

거치면 평범한 팀도 강팀으로 거듭난다. 그 조련술의  비결은 다름 아닌 '메모' 를 통한 철저

한 사전준비와 선수들과의 교감交感이었다.

 

 

 

 

 

2001년 1월 , 국가대표팀 감독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선수들과 첫 미팅을 가진 히딩크는 가슴이 답답해

지는 심정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 레알 마드리드 등 세계적인 팀을 지휘했던 그의 눈에 비친 한국 선수

들의 수준은 그야말로 참담한 실정이었다.

우선 전술이해도나 체력, 기본기 등 선수 개개인의 축구실력 자체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선수들 간의

조직력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패스와 패스가 절묘하게 이어지면서 득점까지 연결되는 것이 축

구의 묘미가 아닌가,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공만 잡으면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한다든가, 아웃될   

게 뻔한 공도 앞뒤 재지않고 달려가 잡으려 하는 등  '생각없는 축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위기 후 득점

찬스가 와도 살리지 못하고 번번히 무산시키곤 했다. 프리킥이나 코너킥 등 세트플레이도 전혀 이뤄지

지 않았다.

'이게 5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한 팀이라니....'

 

대한민국 대표팀의 실력과 마음을 사로잡은 히딩크의 3대 무기

히딩크는 다이어리를 펴놓고 선수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장단점을 세밀히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미쳐 

모르고 지나쳤던, 한국 선수들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는 양 발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 유럽에

 서 뛰는 세계  정상급 성수들은 대게 자신이 잘 쓰는 발이 정해져 있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슛은 오른발

로 하면서 패스는 왼발로 하고 있었다. 이는 좌우를 자유롭게 오가는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의

미였다. 둘째는 국가대표로 뛴다는 자부심과 충성심이었다. 철저한 개인주의 탓에 국가대표로 선출되 

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외국 선수들과 달리, 한국 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다는 것을 '가문의 영

광으로 여겼다.

'이런 선수들이라면 한 번 해 볼 만하다!'

히딩크는 자신이 생겼다. 물론 주먹구구식은 절대 통하지 않았다. 태극전사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려면 뭔가 치밀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물론 그 첫걸음은 메모에서 시작되었다. 선수들의 플  

레이를 녹화한 자료를 수십 번씩 돌려보며 개개인의 특징을 하나하나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대표팀 소

집 기간에는 선수들의 개인기, 멘탈, 체력 상태를 체크하고 이를 팀 전술 소화능력 킥 드리볼 회복력 목

표의식 투지 등 20여 개 항목으로 수치화해 노트북 컴퓨터에 정리했다. 특정 선수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의 장단점이 바로 동영상으로 뜰 정도였다.

 

 

 

히딩크의 메모법 중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항 것은 녹음기를 즐겨 사용했다는 점, 축구감독인 그는 사무

실에 앉아 메모를 하기 힘들다, 대신 휴대용 소형 녹음기를 휴대하고 다니며 개선해야 할 점이나 아이 

 디어가 떠오를 때면 그 자리에서 녹음을 해 두었다가 나중에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이렇게 수집한 다양

하고 체계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생각하는 축구의 회로를 심어 나갔다. 가령 누

가 패스미스를 하더라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찼느냐?'고 욱박지르기 보다 '왜'그렇게 했는지를 따져

가며 패스각도와 공간 활용법을 설명하며 잘못을 지적했다.

물론 히딩크가 축구를 가르치는 데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경기장 밖에서의 그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

지와도 같았다. 부상 선수들은 자주 불러 따듯한 말을 건네기를 잊지 않았고, 미숙한 플레이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 선수가 생기면 앞장서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코칭스테프는 물론 박지성, 홍명보, 이  

영표, 김남일 등 선수들의 이름은 모조리 다이어리에 적어 외워 불렀다. 홍명보는 '멩보' 김남일은 '나  

미리' 식이긴 했지만, 대다수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친

화력이 돋보인다.

 

최후의 1%까지 내다보고 준비한 히딩크

그렇게 1년 반 동안 히딩크의 조련을 받은 한국은 세계 어느 팀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강팀으로 탈

바꿈하게 된다. 2002 월드컵 개막을 50일 앞둔 4월 11일, 히딩크는 안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  

한다.

"현제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50%다, 하루에 1%씩 높혀 나가겠다."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미국, 포르투갈, 폴란드 등 톱클레스 팀들과 한 조에 편성된 한국은 매

경기에서 상대를 압도하며 2승 1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다. 예상을 뛰어넘은 결과에 대한민국 전

 체가 환호의 물결로 들썩였다. 그러나 히딩크는 결코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그의 펜은 16강을 넘어 8

강전, 4강전 플랜을 짜느라 분주했다.

그때까지 히딩크가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선수들의 체력이었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으로 심리적

우위를 점한 채 강한 체력을 앞세워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비며 찬스를 만드는 것이 히딩크 사단의

핵심전략이었다. 그러나 기량차이가 월등한 강팀들이 즐비한 16강전 부터는 이런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고, 결국 승부는 연장전 내지 승브차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히딩크의 계산 이었다.

이후 월드컵은 히딩크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전통적으로 수비가 강한 이틸리아에 공격수 5명을 투입한 '파이브톱' 전술로

맞불을 놓았고,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특히 히딩크의 메모가 빛을 발한 경기는 스페인과 치른 8강전이었다. 전후반 90분 동안 수많은 실점위

 기를 마강낸 우리 선수들은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마자 그대로 그라운드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히

딩크는 쉬지 않았다.

 경기시간 내내 새로 짠 전술 도면을 일일이 선수들에게 보여주며 작전지시를 내리기에 바빳다. 반면 스

  페인의 카마쵸 감독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연자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심판의 판정을 문제 

삼으며 실랑이를 벌이는 등 다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곧 이어 시작된 연장전, 한국 선수들은 수차례

스페인의 골문을 위협하며 몰라보게 달라진 플레이를 선보였다. 히딩크의 작전지시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연장전 에서도 골이 터지지 않자 경기는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히딩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승

부차기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는 선수들에게 자주 승부차 

기 연습을 시켰다. 게다가 전날 밤 비디오 분석을 통해 스페인의 어느 선수는 어느 발, 어느 방향으로  

차는 것을 선호하는지 모두 파악해 둔 상태였다. 심지어 골키퍼 카시야스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

을 선호한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때부터 스페인 선수들에 대한 데 

이터를 차곡차곡 모아둔 덕이었다.

히딩크는 한국의 골키퍼 이운재에게 키커가 어느 쪽으로 공을 찰지 신호를 보낼 준비까지 해 놓고 있었

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이운재는 세번 내리 골을 허용했다. 이운재가 '자신 있으니 내 판단을 믿고 

맡겨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세 번 공이 날아온 방향은 히딩크가 예상한 방향과 정확히 일

치했다고, 히딩크의 철저한 준비성과 혜안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넉 달 앞으로 다가왔다. 축구팬들에게는 지난 2002년 4강 신화를 달성한 히딩

크가 새삼 그리워지는 시즌이기도 하다.지금 히딩크는 우리에게 없지만, 메모의 힘을 무기로 세계 축  

구계에 돌풍을 일으킨 그의 마인드를 우리 인생경영에 도입해 보는 건 어떨지?  

 

 

어시트스 ㅣ 배효지 기자   디자인 이가희 기자